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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근대문화활성화사업단 게시판 입니다.

광산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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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1-28 조회 1004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부산광역시 장 노년 일자리 지원센터 

부산 근대문화자산 활성화 사업단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장 광산(鑛山) 마을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은 기장의 그 궁금한 광산(구리 광산) 마을에 대한 모든 

것 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광산마을 입구 정류장> 


 


부산의 16개 구 군중의 하나인 바로 이곳이 1개군 기장군이다. 

그 기장군 일광면에 광산(鑛山) 마을이 있다.


 그런데 주소지로는 

일광이지만 동해남부선 열차(전차)를 타고 좌천역에 내려 

약 20~30여 분 걸어가도 되는 마을이 구리 광산마을이었다. 


따라서 이름만 들어도 유추할 수 있듯, 이곳은 예전에 작은 

탄광촌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광업회사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개천 일대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만들어서 

사택들을 지었고, 자원 약탈을 목적으로 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던 아픈 역사가 남겨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 정자와 희귀한 나무 생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나무>




육안으로 보아도 위태로운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다 쓰러져가는 

주택 담장들의 풍경은 다른 시대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은 주민들도 이 마을을 떠나실 것 같은 쓸쓸함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마을을 떠나긴 쉽지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광산마을을 방문했을 때엔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뭇 조금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마을 입구에 “꽃 피는 마을 광산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새워져 있었고, 마을 곳곳이 보수로 새롭게 단장돼 있었다. 



새롭게 단장된 마을회관.......

 


위치상으로 동해고속도로 고가교 아래 개천 주변으로 

형성된 이 작은 마을은 아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참 묘한 풍경을 가졌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림 

같은 작은 산기슭의 나름대로 아담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그 옛날 작은 마을 그날, 광산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많이 아쉬운 것은 동해고속도로 고가다리 때문에 동네 자체가 

가려져있어 풍경 자체를 잃은 것이 많이 아쉬웠다.


 

역사가서려있는 동네........


그때 다리 공사 당시 몇 사람 안 되는 작은 마을 사람들이 

데모 아닌 데모를 해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이제는 이곳이 따뜻한 스토리의 영화 촬영지로 

탄생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선뜻 들었다. 


그래서 지난 아픔들을 보상받고 치유받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부산 기장군은 일광면 원리 일원에 위치한 

‘광산마을’이 국가 균형 발전 위원회가 주관하는 ‘2020년 새뜰 마을사업’ 

공모사업 대상지로 선정됐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광산마을은 부산 유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유적지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강제 노동에 동원된 아픔을 가진 ‘지옥 마을’이라 

불리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강제징용의 흔적이 상처로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렸어도 그동안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채 

마을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만 있었다. 이번 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광산마을은 역사적인 문화유산으로 간직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 될 전망해 본다.




또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픔을 스토리텔링 화해 테마거리를 만들고, 

편백나무가 집중돼 있는 곳에서부터 달음산 

등산 코스 초입부까지 산책길도 나름대로 조성되어 있었다.



▶ 이번 시간에는 아직도 강제징용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기장군 일광면 광산마을 이야기를 직접들은 인터뷰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장군 일광면에 위치한 광산마을. 1930년대 일본 기업이 마을 뒷산인 달음산에 광산을 개발하면서 형성된 곳입니다. 

여기서 나서 학교를 다녔다는 50대를 만났다. 



마을 평상에 앉아서........


그는 작은 나무 평상에 나와 있었고 

나 역시 다리도 아프고 가을 햇볕도 따가워 그 평상 모서리 

걸터 앉아 친구처럼 친한 말로 인사를 하고 고향친구를 만났듯이 

궁금한 마을의 탄생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잘 몰라요 근데 우리 아버지가 광산마을! 

최초의 광산 광부이고 나는 그의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이 마을의 최초이자 현존하는

 인물이 부친이 된다며 

힘주어 광산의 옛날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주문을 외듯이 

줄줄 외워는 듯했다.



<가장젊은 주민 50대 인터뷰>


댁이 어느 집입니까? 네 여기요 저게 우리 집입니다...

실례지만 한번 들여 다 봐도 되겠느냐는 물에 스스럼없이 

들여 다 보라고 하면서 옛날에 방이 4개였고 어디가 어떻게 

지어졌다며 소상히 이야기를 하는 나의 귀에는 그렇게 크지 

않는 집에 왠 방이 4개나?? 그래서 보았더니 일본 사람들이 

집 처럼 작은방들이 4개였고 지금은 

아버지가 자주 하는 말씀이 일제강점기 때 우연하게 일본 사람들이 달음 산에 와서 산에 있다 보니까 물이 고여 있었대요. 

물이 빨간 물이 나와 있었대요. 그래서 '아 여기 뭔가 있다'개발하기 시작해서 광산을 개발했대요. 

그게 첫 유래이죠 일제강점기 5대 구리광, 충청남도 이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광산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아픔의 강제징용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옛날 모습들의 방 4개의  그 집안의 모습> 



그의 아버지 최 모 씨(86세)의 부인 이 모 씨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아내 이모(80세) 씨가 이 마을 현존하는 최최의 광부 남편과 

최초의 만남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때 남편은 20대 젊은 나이에 광산에 돈을 벌어 부산 시내에 나와 

돈을 마구 쓰는 바람에 결국 그때 그 시절에 중매 아닌 연애결혼을 

했다는 믿기지 않은 놀라운 이야기도 해주었다 


 


광산시절의 그때 그집들..........

기장군 광산마을 주민 8살일 때 일광면 화정리 살다가 아버지가 거기서 

여기까지 일하러 다녔거든요. 산길로 다니면서…


일본인들이 주동을 하고 한국 사람은 광산 굴 안에 구리를 캔다는 말을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해방도 되고 했죠. 집들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옛 광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지에 서는 당시 일본인 간부들이 사용했던 일본식 사무실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마을의 구조를 보면 마을의 주택들에도 일본식 건축 방식과,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옛날에 다른 분이 이 동네 이장님을 인터뷰 한 내용을 빌리자면! 

기장군 일광면 광산마을 축대를 기준으로 해서 위쪽 있고, 아래쪽이 있습니다. 

위쪽에는 일본 사람들이 기거를 했고 맨 앞집은 일본 사람이 간부급이 독채로 사용했고 그 뒤쪽으로는 건물이 쭉 있습니다. 

한 동에 두 집이 살았습니다. 


  


"달음산 기슭의 아주 작은 마을 그 자체의 그 역사를 가진 

광산마을!!! " 슬픔의 역사가 서린 그 모습을 뒤로 한채

그래도 행복한 미소로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광산 마을 답사 현장을 마치면서...........



감사합니다.(20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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