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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공존의 그늘'이어서는 안된다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7-10-15 조회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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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공존의 그늘’이어서는 안 된다

 

   단편 만화 한 편을 보고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이 땅의 고단한 어르신들이 너무나 애처러웠다. ‘소풍’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무서운 재앙의 예고편이었다. 여느 즐거운 외출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눈물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 가장이 있었다. 암 투병 중인 아내 수발에 자녀 대학등록금 대기도 빠듯한 택시기사였던 그는 치매에 걸린 노모까지 모셔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꾀병을 부리고 증상이 심한 척해서 입소 등급을 받아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뒀다. 하지만 노모는 자식 뜻대로 하지 않았다. 한숨만 푹푹 내쉬는 아들. 그게 아닌데. 자식과 떨어지기 싫어서 그랬는데.

노모는 어릴 적 꿈을 꾼다. 빨래터에서 다친 자신을 꼭 껴안은 어머니가 하신 말씀. "시상 천지에 니랑 내랑 둘 뿐인데. 니를 앞세우고 내가 우예 살끼고." 꿈에서 깨어난 노모는 결심했다. 소풍을 떠나기로. 자식 시름을 덜어주기로. 곱게 분단장을 한 뒤 짐짓 치매 환자티를 내면서 아들에게 바깥나들이를 재촉한다. 강변 공원에 도착하자 먹을 것을 청해 아들이 자리를 뜬 사이 돌을 가득 넣은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물에 뛰어든다. 노모의 독백이 심금을 울린다. ‘마른 잎처럼 시들어가는 내 새끼야, 너로 인해 내 인생은 온통 꽃밭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죄인인가. 아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노모도 모자의 정이 그리웠을 뿐이다.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게 아니질 않나.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회와 우리 모두가 책임질 일은 아닌지. 그 삭막한 풍경에 가슴이 아리고 숨이 막히는 듯하다.

   '거울 속의 늙은 여자는 울고 있었다. 아무리 웃기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거울 속의 여자쯤은 마음대로 될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 박완서 선생의 단편소설 '황혼'에 나오는 내용이다. 며느리로부터 어머니 대신 늙은 여자로 불리는,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당하는 노년, 한국사회의 세대 간 갈등을 다뤘다. 30여 년 전에 '공존의 그늘'을 그려낸 선견지명이 놀랍다.

‘늙으면 죽는다’. 이 명제는 앞으로 수십억 년 동안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요, 진리다. 하지만 '죽는 것은 늙었다'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그리고 젊은이들이 질병이나 사고로 수없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대로 살다가 나이들어 죽는 것은 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듯하다. 사회에서 퇴출당해 도움이 안 되는 존재, 빈둥거림, 쭈글쭈글함, 누추함 등등. 더욱이 평균 수명이 올라가면서 우리 사회가 짊어질 부담도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늙는 게 정녕 용서 못할 범죄인가. 정상이 아닌 기형인가. 늙음과 젊음 모두 삶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단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노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왜곡된 사회상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전 한 판사가 법정에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한 모욕적인 발언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당시 “마이크가 켜진 줄 몰랐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놨었다. 판사의 발언은 얼핏 '늙으면 죽는다'는 표현과 비슷하나, 그 의미는 천양지차다. 숙명론적인 시각이 아닌 당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정 나이를 먹은 늙은이는 모조리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배경을 깔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노년층에 대한 혐오까지 담고 있는 학대적 표현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말이다. 젊음의 유혹 못지 않게 노년의 아름다움과 성숙함이 있음을 왜 모르는가. 우리가 해 저무는 노을을 보고 경탄하는 것, 낙엽이 지기 직전 화려하게 폭발하는 단풍에 취하는 것은 자연이 보여주는 장엄한 '늙음‘이 아닌가. 그뿐이랴. 오래 묵힌 된장과 간장의 그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오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나 오래된 와인의 그 감칠 맛이란. 이들의 아름다움은 혹독한 시련을 견뎌낸 결과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정녕 젊은 세대와 노년은 공존하기 힘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의 미래는 없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게 자연의 이치이기에. 그걸 거스른다면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라 내세울 자격도 없고, 행성 지구에 터전을 잡고 살 의미도 상실할 것이다.

노년층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늙음을 지나치게 자각하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고, 그 일은 다시 강한 열등감을 낳는다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충고를 마음에 꼭 담아두기를.


 이순 최원열 기자 choiwonye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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