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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구, 인문학으로 해석하다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9-07-21 조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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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해석해본 부산 서구!


-서구 아미 비석문화마을 해설사 박분란휴먼북 

 

 한해의 반을 훌쩍 넘기고 나머지 절반을 열어나가는 7월의 휴먼북 주인공은, 초긍정 마음으로 늘 입가엔 미소를 잃지 않고 재능기부 봉사활동과 지역문화 해설사 활동으로 행복한 삶을 전파하고 있는 박분란 해설사다.



                                       휴먼북 '박분란(오른쪽)'이 부산 서구를 인문학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휴먼북 박분란은요?

저는 서구에서 오래 살고 있는 박분란입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서구의 인문학 수업을 새롭게 공부하면서 제가 얼마나 문외한인지를 깨닫았고 잘 모르고 있었던 게 많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비석문화마을은 저희집 가까이에 있는 동네로만 알고 지내 왔고, 20년전 봉사활동을 갔을 때 일본글자가 많고 집모양이 이상하네라고 생각이 들 정도뿐이였습니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저는 무척 놀라웠고 굉장히 아픈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석문화마을 해설사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구는 어떠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동네 서구는 역사가 정치, 문화가 함께 있는 곳이죠.

 1023일이라는 기간에 임시수도가 부산에 와 있었고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가 부산에 옮겨 온 것이고 많은 피난 학교가 있었습니다.

 서구에는 옛부터 많은 학교들이 있어 와서 일제 강점기부터 교육의 도시 서구 문화의 도시 서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그 학교들이 보통의 학교가 아니고 그 역사가 그냥 역사가 아니고 일본에 의한 교육들도 있었고, 차후 우리가 경남상고, 지금은 부경고등학교는 굉장히 민족적인 학교의 면모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배워온 역사는 획일화된 역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주위에게도 제대로 된 우리의 고장과 나의 역사를 알고 오늘과 내일이 같이 공존하게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 내가 조금 알고 있는 지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소유하고 함께 같이 간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조금 더 정직해지지 않을까하여 이 일을 계속 하려고 합니다.

 

-서구가 문화의 중심이라 하셨는데 특히 어떤 곳들이 있는가요?

서구는요,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있는 곳으로 1925년에 경상남도 도청으로 있었던 곳입니다.

 임시수도 기념관 관저는 청와대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던 곳이고 또 피난시절에 교육부라든지 학교라든지 하는 관청들이 많이 있던 곳입니다. 또 토성동이라는 곳은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대통령이 두 분이나 나온 곳이기도 해서 서구는 문화와 역사가 함께 하는, 향기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해수욕장인 송도 해수욕장이 있고 이태석 신부라든지 장기려 박사라든지 소알라시오 신부 등이 계시던 곳, 그런 의미있는 곳이어서 봉사와 의료가 함께 하는 곳이기에 모두가 알고 나누었으면 굉장히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해설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신데 마을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희 비석마을은요 말그대로 무덤 위에 집이 있습니다. 무덤 하나인 큰 무덤위에는 집이 3채가 있는 걸 지금도 보실 수 있구요. 그 옛날에는 큰 무덤위에 천막을 쳐서 40-50명이 함께 살기도 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곳곳에 보시면 계단, 현관, 축대 또는 경사진 집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 돌들이나 자재들이 있는데 그것이 모두 비석으로 또는 상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보시면, 많은 방문객들이 무덤이 어딨지 하고 물어 보십니다. 우리나라 무덤은 매장문화여서 봉분이 있지만 일본은 화장식이라 화장 후 골호에 넣는 가족묘가 많았기 때문에, 묘가 크고 일본인들도 부의 상징으로 산위에 묘를 크게 했던 게 지금도 대학병원 뒤에서 아미동 산상교회 꼭대기까지가 전부 일본인 묘지였던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화장장도 있었고 장재장도 있습니다.

 아미초등학교에는 총천사라는 절이었는데 왜 초등학교로 지었냐면요. 어린아이들만큼 센 기를 눌려주는 게 없어요.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보시면 까치발로 발가락으로만 뜁니다. 곧 넘어질 것처럼 뛰지만 아이들은 잘 넘어지지 않죠. 용천에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에 그래요. 초등학교 애들이 소리가 꺄르르 나지 않습니까? 그런 애들이 운동장을 뛰어 가면 그 에너지가 넘쳐요. 절의 나쁜 기운을 다 없앨 수 있는 게 초등학교라서 그기에 초등학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곳곳에 일제강점기 왜관시절에 있던 무덤이 1909년부터 아미동으로 옮기기 시작해서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일본 사람들 무덤이었던 곳이죠. 한국전쟁 이후는 그 무덤이 주거지 형태로 바뀌게 된, 아주 오랜 역사와 삶과 건축이 삶의 애환과 함께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지역입니다. 지금도 집이 종이 박스로 나무상자로 되어 있는데, 그 나무상자도 정상적인 게 아니라 사과상자나 남부민들 생선상자 같은 걸 덕지덕지 붙여놨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이후의 건축 특히 한국전쟁 피란 시절의 주거형태를 고대로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지금도 연탄을 때고 있는 어르신들이 살고 있고 그 좁은 방에서 5-6명이 생활해 왔지만 어떤 분은 아들 7명을 낳아서 은행원을 배출했다고 자랑하던 곳이 바로 그 곳입니다.

 오시면 자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분들이 이 마을을 찾았으면 하시는지요?

저는 다양한 연령층의 분들이 오시길 바랍니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생들은 자기세대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여기 와보게 되면 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집에 가면 집안에 화장실이 있고 또 찬물 따뜻한 물 틀 수 있잖아요. 여기 보시면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고 옛날에는 이곳에 물이 없어서 보수동 영락교회에서부터 물양동이를 이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땐 하루에 물을 4동이밖에 못 이고 오니까 물을 귀했지만 지금은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온수 냉수 또 난방까지 잘 할 수 있지만 지금도 그렇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라고 전해 드려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오시면 그 옛날에 어렵게 살던 추억을 되새기며 지금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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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북 열람신청  https://www.busanhumanlib.or.kr/library/humanbook/view/341

방영숙 진선혜기자 ysook40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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