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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 서오선 백제문화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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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5-24 조회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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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 이야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다’


국립경주박물관대학 44-1기 토요강좌에서 백제문화를 강의한 서오선(徐五善) 백제문화재연구원장을 통해 영남 지역엔 조금은 생소한 백제문화의 맥락을 살펴본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으로 백제 문화의 특징을 여덟 자로 표현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15년 기록에 나오는 말이었다. “춘정월(春正月)에 작신궁실(作新宮室), 즉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으로 김부식이 기록한 내용이다.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7)은 동명왕 고주몽의 셋째 아들로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복형인 유리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자 형인 비류(沸流)와 제 땅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열었다


백제(百濟) ‘100명이 강을 건너세운 나라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구분할 수 있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積石塚)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여성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共有)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복군주 근초고왕

삼국시대 3대 정복군주를 꼽는다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신라 진흥왕, 그리고 백제에서는 단연코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임금으로 서기 346년에 즉위하여 375년까지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폭을 넓히고 역사서 편찬, 수도의 확장, 왕권 강화, 해상 무역 등을 발전시키는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칠지도 왜왕에게 하사

백제는 369년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는데 그 실물이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된 바 있다. 74.9의 칠지도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태화 4(369) 5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

백제의 미소로 알려져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 중앙의 소탈한 모습의 본존불상과 좌우의 반가 사유상과 보살 입상은 첫인상에서부터 일반적인 삼존불상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의 파괴, 즉 초탈함을 느끼게 한다서산 마애삼존불상의 진정한 가치는 조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신이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친근한 불상의 얼굴과 더불어 태양의 조도에 따라 바뀌는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의 미소는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당시 살아 움직이는 백제인들의 소탈한 미소를 현대인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枕流王) 1(384)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백제로 들어옴으로써 최초로 전래되었다. 침류왕이 외국 승려를 환영했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이미 백제에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72년 이차돈 순교 후 법흥왕이 불교를 인정한 신라와는 반대 현상이다.

 

백제의 미소, 금동관음보살입상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상 걸작으로 꼽히는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지난 1907년 부여군 규암면에서 출토됐지만 1922년 일본으로 넘어간 뒤 자취를 감췄고 최근 일본의 한 기업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몸을 살짝 비튼 자세 등 뛰어난 표현력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주에서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 등 볼만한 것들이 언제 만들어졌을까? 대개 백제가 멸망한 뒤 황룡사의 아비지, 불국사의 아사달과 아사녀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사람들이 경주로 왔을 때 그들의 아이디어와 힘을 합쳐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불국사 청운교·백운교의 아치, 석굴암 입구의 아치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시작되었다. 고청 윤경렬 선생(「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의 저자)은 KBS기자가 물었을 때, “첨성대 곡선은 백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 적석총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한강을 뺏기고 금강이 있는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금강의 지리적 여건을 가장 잘 활용한 무령왕이 금강에서 배를 띄우면 양자강 하류로 가니까 중국의 양무제와 문물교류를 하면서 뛰어난 문물을 가감 없이 흠씬 받아들여 백제문화의 특징인 세련되고 우아하고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백제문화의 정수를 몇 점 살펴보자.

◇ 무령왕릉 : 아치천장을 만들면서 벽돌무덤이 나온다. 집지을 때 가장 어려운 게 천장이다. 무령왕릉은 앞뒤 벽은 세우고 옆에만 좁혀들어 가니까 아치가 되는데 맨 위 사다리꼴 모양돌이 핵심이다.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벽돌 중에 “양나라 관에서 쓰는 벽돌기와를 그 모델로 했다”는 기록이 있어 확실히 알 수 있다.

◇ 지석 : 지석 때문에 무령왕릉임을 알게 됐다. 지석에는 “돈 만 냥을 주고 토지 신으로부터 이 땅을 샀다. 신지(神地)를 사서 묘를 만들고 그걸 문서화했다. 그리고 어떤 율령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토지매매계약서가 1천몇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한 걸까? 서 원장이 이 계약서가 유효한지를 대법관에게 물어본 바, 지금의 법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이지 신과의 계약은 자신들도 모른다고 답했다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무령왕 땅인 셈이다. 그 당시의 재미난 풍습을 보여주고 있다하겠다.

◇ 관장식 : 금관이 있는 게 아니고, 백제임금은 “검은 비단으로 된 모자를 쓰고 거기다 금으로 만든 꽃을 장식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장식은 왕과 왕비, 각각 2개로 좌우 대칭이다. 좌우의 크기는 1mm 정도 크기가 다르다. 애초에 모본이 있었다면 두 개가 똑같을 텐데, 하나를 먼저 만들고서 그걸 갖다 대고 또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처음 걸 만들 때는 금판에다 직접 그렸다. 그 문양이 굉장히 활달하면서 영락을 매달았다.

백제 문물을 보면서 백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고학의 어려운 점은 물건을 보면서 거꾸로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비 관장식은 보기에도 차분하고 여성적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꽃병에 연꽃이 꽂혀있는 문양이 들어있다.  

◇ 그릇받침 : 이런 건 중국에서는 그 예가 없다. 무령왕릉 출토품은 아니지만 공주시기의 그릇받침이다. 형태가 첨성대와 비슷한 분위기를 준다. 그릇받침은 경주에도 있고 김해에도 있다. 경주 것은 직선적이고 강한 반면 백제 것은 장고마냥 부드럽고 어디 딱 각진 데가 없다. 그런 부분에서 윤경렬 선생은 “신라 건 각이 지는데 첨성대는 아무리 봐도 각진 데가 없다.”고 했다.  

◇ 금동대향로 : 그 형상은 맨 위로부터 봉황, 봉래산, 물속, 맨 아래에 용이 발을 벌리고 있다. 이 발은 여의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봉황의 턱밑에 있는 여의주는 언제 떨어질까? 향이 올라가면 봉황이 움직이고 여의주가 용에게로 떨어진다. 용이 여의주를 가지면 승천하면서 기원하는 바도 올라간다. 행사가 끝나면 불이 꺼지고 봉황이 내려앉으면 용은 여의주를 뺏기고 다시 물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이런 스토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은 암·수 중 어느 것일까? 봉황의 날개가 오른쪽이 조금 작고 왼쪽 것이 조금 커서 암수의 봉황 한 쌍을 이루게 했다는 스토리텔링이다.

백제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이런 창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향이 나오는 구멍도 크기가 마구잡이로 뚫려있다. 만들어놓고 보니 구멍이 작아서 향이 꺼지니까 이렇게 대처를 했던 것이다. 금동대향로는 사실 실패작이다. 그러면 다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백제 사람들이 그렇게 창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기능에 문제가 없다면 그 외는 용서해주는 윗사람의 아량이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항상 도전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주정호 김진옥 기자  aceof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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