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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9-05-08 조회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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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공식 외교사절단. 조선과 가까운 쓰시마번이 임란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조선을 무마하기 위해 추진한 誠信交隣(성신교린) 외교였다.

올해 복원된 조선통신사선과 취타대  


정사, 부사, 종사관 삼사를 비롯해 제술관, 독축관(讀祝官), 화원, 의원, 역관, 마상재, 소동(춤과 노래에 뛰어난 남자 청소년으로 일본에서 소동을 흉내 낸 가라코오도리춤 성행)등의 300~500명의 통신사 일행이 오가는 시기에는 전쟁이 없었다.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문화를 다양하게 발전시키면서 통신사 일행의 뛰어난 글재주와 시화 가무 마상기예 등에 경탄하며 환호하였다.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양재역~판교~용인~죽산~충주~문경~예천~의성~영천~경주~울산~동래에 도착하면 동래부사를 비롯한 지방관과 수령들이 뜰에서 국서를 향해 네 번 절한 뒤 동래부사가 계단을 올라 정사에게 임금의 안부를 묻는 문상례(問上禮)를 행한다. 세 사신은 동헌(東軒)서헌(西軒)장관청(將官廳)에 각각 여장을 풀었다.


복원된 조선통신사선과 쓰시마 국제학술대회에서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본 한일관계 미래상'을 발표한 필자

    

이튿날 세 사신은 낮에는 군관들을 관덕당에 모아 활쏘기를 시켰고 밤에는 기생과 악공들을 정원루에 모아 풍류를 즐겼다. 다른 사행원들은 임진왜란때 순절한 93인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를 찾아 복수 대신 국익을 위해 사행을 떠나는 자신의 처지에 부끄러운 눈물을 흘렸다.

 

조선통신사선

세 사신은 부산진성 영가대 앞 선착장으로 향한다. 영가대는 1614년 순찰사 권반이 전선(戰船)을 감추기 위해 선착장을 만들 때 파 올린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 위에 세운 8칸 누각이다.

 

선착장에는 통신사가 타는 기선 3척과 짐을 싣는 복선 3척 등 총 6척이 정박해 있다.

부산의 경상좌수영과 통영의 경상우수영이 나누어 제작한 것으로 배는 길이 40척에 넓이가 15척으로 전선(戰船)에 비해 조금 크고 견고했다.

 

사신들은 해신제(海神祭)로 바다 사행길의 두려움을 떨쳐낸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쓰시마 뱃길에 풍랑을 만나면 돛단배는 침몰할 수 밖에 없다. 조선조 1703년 조선통역관 113명과 1명의 일본인을 태운 배가 대마도에 도착하기 전에 침몰되어 113명의 조선통역관이 목숨을 잃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정사 기선)은 강원도 금강송 900그루로 총길이 34.54m 너비 9.3m 높이 3.065m로 건조해 72명이 탑승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선 승선체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맡은 중구 문화해설사회 소속 진선혜 문화관광해설사     


차수약제 사즉무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이 생각난다.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고도 임금에게 시기 받아 백의종군하며 마지막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비장한 생을 마감한 장군은 此讎若除 死即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통신사는 쓰시마를 거쳐 이키~아이노시마~지시마~시모노세키~세토나이가이로 들어간다. 이어 나가시마~가마노세키~가마가리~히비~우시마도~오사카에 도착해 동서본원사(東西本願寺)에 묵었다. 그 후 6척의 조선선과 경비 요원만 남겨둔 채 여러 다이묘가 제공한 배를 타고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여 육로를 통해 교토를 향했다. 조선 전기는 여기가 종점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1617년을 제외하곤 에도까지 이동했다. 통신사가 교토까지 여행한 때는 무신정권 지도자인 쇼군(將軍)이 교토에 있었던 시기로서, 대체로 조선 전기가 이에 해당한다.

 

일본이 이토록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조선통신사를 접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목적이 원인이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는 집권 초기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국제 관계를 통해 과시하려 했다. 또한 조선 침략에 대한 보복의 두려움도 불식시키기 위해 우호교린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부의 그것을 검증하는 방법으로 주변 제국이 막부의 무위(武威)에 복속하는 형태로 국제관계를 위장했고 국민들에게는 조선통신사를 복속 사절로 인식시켰다.

 

영도 조내기 고구마와 고추, 담배, 호박 유입   

1763년 영조 39,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조엄(趙曮)은 쓰시마의 고구마를 영도에 재배케 해 조엄의 고구마조내기 고구마로 영도가 고구마의 시배지가 되었다. 고구마를 비롯해 호박 담배 고추가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서 조선에 유입되었으며 성리학, 인쇄술, 대장경 등의 유교 불교 선비 문화는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조선통신사 사행 길은 고행길이기에 술과 함께 한다. 임금은 하직인사를 온 세 사신에게 사옹원에서 빚은 술을 하사하며 무사귀환을 당부했다. 술과의 동행은 부산을 떠나 일본에서도 이어졌다. 쓰시마의 제백주(諸白酒), 하카다의 연주(練酒), 카마가리의 인동주(忍冬酒), 미하라(三原)술과 조선의 소주, 계당주(桂唐酒)등이 함께 했다.

 

그러나 1763년 정사 조엄은 영조의 금주령으로 사행 내내 술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탕평책의 영조가 내린 금주령은 종묘제사에 올리는 술조차 감주로 대신하고 금주령을 어긴 병마절도사 윤구연을 숭례문 앞에서 참수하기도 했다. 조엄은 쓰시마에 도착하자마자 술은 절대 접대 받지 않는다고 밝히고 심지어 술지게미에 절인 전복요리를 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고 관행처럼 여겨진 일본인과의 술잔을 바꾸며 우의를 다지던 일도 없어졌다. 에도의 공식 연회에서조차도 일본 측의 양해를 얻어 빈 그릇으로 술잔을 비우거나 빈잔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만 했다.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 조선통신사 국서 교환식과 시즈오카현 세이켄지 현판 '경요세계'

 

정작 금주령이 내린 1763년 사행에는 오히려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쓰시마에 도착하자마자 제2복선장 유진원이 창고에 떨어져 죽고 22살 소동 김한중이 병사하며 격군 이광하가 자살했다. 도훈도(수학에 능통한 관리)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 살해된다. 최천종은 술에 약을 타서 마시면 원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의원의 처방에도 불구, 어명인 금주령을 어길 수 없다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643년 에도시대 통신사 박안기(朴安期)독축관은 시즈오가현(静岡県)의 세이켄지(清見寺)에 유숙하며 瓊瑤世界(경요세계)’라는 현판 글을 남겼다'두개의 옥은 서로 빛을 비춰 주어야만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낼 수 있다(つのはおらしってこそらのしさをせる)’는 의미다. 필자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화친을 강요당한 조선의 유약함을 느낀다. 일본에 복수 대신 화친을 선택한 결과는 200년 후 풍전등화의 무력함 속에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은 백성이 되지 않았던가?      


주정호 김진옥 기자 lymanj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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