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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장 용각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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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0-29 조회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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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장 용각을 아십니까?


용각 용왕대제 봉행



2018년 10월 17일은 음력 9월 9일이었다. 매년 음력 9월 9일은 용각에서 동래구 문화원이 주최하고 동래구와(사)동래온천번영회가 주관하는 온천장 번영회 위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온천장 소재 동래온천 용
각에서 온천수의 영구분출을 기원하고 지역발전을 기원하는 용왕대제가 성대하게 이뤄졌다.   



부산에 살면서도 온천을 이용하기만 하였지 온천물을 많이 나오게 도와주는 용왕님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용각 내에 온정개건비가 있는데 내용을 보니 직무를 밝히고 온갖 쇠폐한 것을 일으켰는데, 이에 온정을 다스려 감관에게 명령하여 고쳐 짓도록 하였다. 비스듬한 동쪽 옛터에 유좌를 고쳐 임좌로 앉히고 성안의 재목을 모두 운반해 와서 7월 상현에 개기하고 8월 24일에 입주하고 9월 7일에 상량을 하였다. 모두 9간인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고 상쾌하고 화려하기가 마치 꿩이 날듯이 으리으리하였다. 지키는 집을 짓고 대문을 세우고 안에는 비석을 세웠다. 아아, 강공이 아니면 이 온정이 없었을 것이요 감관이 아니면 이 옥사가 없었을 것이다. 명을 지으니 이러하다. “공께서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들이 힘입어 살게 되고 공께서 온정을 수리하니 사람들의 질병이 없어졌다. 천만년이 되도록 입으로 또 비석으로 전하리라. 요산 송광적이 씀.”


                            

 동래는 금정산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금정산을 배경으로 생성된 온천이다. 이 금정산은 최고봉인 고당봉 외에도 원효봉, 무명봉, 부채봉 등 수 많은 능선으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긴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 산록은 급경사를 이룬다. 이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하천이 발달되었다. 화산지대의 온천에서는 화산의 열기에 의해서 데워진 지하수가 나온다. 비화산지대의 동래온천은 화강암지대에서 생성된 온천이다. 동래 온천장은 동래천과 온천천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 일대는 하천에 의해서 운반물질이 퇴적되어 형성된 범람원이다. 이곳에 온정원을 중심으로 온천마을이 입지 하였고 자연마을로는 금산마을, 중리마을, 차밭골 등이 금정산의 하단부에 위치하였다. 이중 중리마을이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동래온천의 온천수가 나오는 용출 지역의 범위는 부산시 소유인 4호 온천공 (온천1동 96 – 10호)을 중심으로 반경 70m에 밀집되어있다. 1900년대에는 지하 5m 정도만 파도 온천수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1920년 동래 온정의 온천공은 43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땅속의 온정은 서로 연계되어 있기에 온천공이 많아서 용출이 많아질수록 온천이 고갈된다. 수량이 부족해지면 인접한 온천공끼리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1926년 시유 1호공을 개발하여 모두 이 온천공을 쓰도록 하였으며, 나머지는 폐쇄하였다. 1960년대에는 다시 탕원 개발이 난립하여 온천공은 40여 개로 증가하였다.
 동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이거니와 특히 온천을 할 수 있었기에 관광지로도 유명하였다. 국립여관이라 할 수 있는 온정원은 목욕탕과 객실이 있었으며 많은 욕객이 방문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온천을 온정원이라 썼다. 뜨거운 물이 쏘아 오르는 우물로 생각하며 우물 정(井) 자를 쓴 것이다. 삼국시대의 동래 온정은 왕과 귀족이 찾는 대표적 관광지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권신들이 꾸준하게 동래온천을 찾았다. 조선 시대에는 대군들과 공주 대신들이 동래 온정을 자주 찾았다.


동래온천은 신경계통에 효험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된다. 또한, 자유분방하여 풍류를 즐기고 술과 기생들을 탐했던 양녕대군이 동래 온정을 좋아했다고 한다. 권력층들이 동래 온정을 찾게 되면 왕은 후하게 대접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동래온천은 조선 시대 특권세력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이용했다. 온천에 온 환자들은 도병을 치료하고 휴양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목욕하여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환자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었다.  동래 온천장의 온천은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본인들은 온천을 좋아했다. 1876년 부산은 개항한다. 부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옛날 초량왜관 시절부터 알고 있던 동래온천을 이용하기 위해 전차노선도 온천장까지 연장해서 개통하였다. 그러다가 1883년 부산에 체류했던 일본영사 마에다 겐기치가 조선 정부와 교섭한 이후 일본인들의 동래온천 이용이 본격화되었다.이때 일본인의 1회 입욕은 13전의 입욕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들을 위한 이런 조치는 동래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이듬해 일본인의 온천 입욕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온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던 일본인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일본영사는 1898년 한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하여 1년간 25원을 한국정부에 지급하는 대신 동래온천을 자신들의 부산거류민역 소에 10년간 임대한다는 약조를 받아내게 된다. 일제강점기 동래온천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 원인 중 하나는 역시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동래온천은 부산 시내와 가깝고 1910년 11월 경편철도를 시작으로 1915년 10월 전차노선이 확충되는 등 대중교통이 발달하니 1920년대는 동래온천을 찾는 이용객이 급증했고, 1927년 10월 30일 동래온천 전차종점이 수안동 동래경찰서 맞은편에서 온천장 입구 사거리에 있었던 전차종점이 온천교차로의 부산은행 자리로 이전을 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종점에 내려 온천시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서 건너야 했던 불편함이 사라지게 되었다.  신라 시대부터 전국적 명성을 갖고 있던 동래온천은 조선 시대에 왕실은 물론이고 왜관 거주 왜인들이 방문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개항이후 부산항에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개방되기 시작한 동래온천은 1920년 이미 최대의 온천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동래온천이 일제강점기 때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기능을 담당했던 부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일찍부터 경편철도와 전차 등 대중교통 시설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26년이 되면 이미 동래온천에는 26개의 여관과 요정 등이 운영되었고, 1933년에는 공중목욕탕 4곳, 여관이나 내탕시설을 갖춘 곳이 11곳에 다다랐다. 1930년대 동래 면에 경영한 공중목욕탕의 이용객이 연간 1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놀라울 일이었다. 그때 당시 부산 부 인구가 13만명 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동래온천을 이용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동래온천의 이용객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관광객뿐만 아니라 부산부 동래군 등에 거주했던 상당수의 조선인이 이용했다는 것이다. 동래온천은 그때 당시 범어사와 연계된 관광지로서 수학여행객들과 탑승단의 관광코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동래온천과 불과 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은 역시 관광지의 동래 기생들의 존재이다. 동래온천에는 동래 기생들이 크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거리상 동래 관아와 멀지 않는 곳에 있었으며, 동래온천이 일찍부터 개발됨으로써 기생들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 옛 동래 관아의 기생들이 급격하게 몰락하지 않고 동래 기생조합과 동래 권번 등의 조직적으로 흡수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동래 학춤과 각종 전통무용이 동래를 중심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래온천의 개발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일제강점기 식민성과 근대성이 착종된 관광명소로 동래온천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동래온천의 또 다른 특징은 경상남도와 조선총독부 철도국 등에 맞서 동래 유지들이 온천의 새로운 굴착권과 온천수의 배탕권 을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전국의 온천중 한국인이 배탕권을 확보한 곳은 동래온천이 유일했다고 한다. 이처럼 동래온천에서 한국인이 배탕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동래 유지들의 경제력과 사회문화적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래온천이 일본인에 의해 주로 개발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동래 지역민들과 동래 유지들이 동래온천을 지키기 위해 앞장섰던 노고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온천장의 번화가는 예전만큼 활기를 잃었지만, 세월은 유수히 변해와도 온천수만큼은 변함없이 지금도 끊임없이 분출되니 감사할 일이다.


편도욱, 송명옥 기자
wndhks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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