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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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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0-10 조회 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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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

 

2002년 부산을 뜨겁게 달궜던 아시아드 주경기장의 보조경기장 옆에 쭉 뻗은 길이 나온다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어 호젓한 기분이 든다. 그만큼 시민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는 반증이겠지

하지만 그 정적 속의 중요성을 알고 나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1984111일 현 위치인 부산 연제구 거제동 산126번지에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로 출발해 어언 34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성년 전성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지상 2층 지하 4층 

16500140만 권을 보관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사고(史庫)로 위용을 자랑했으나

포화상태에 이르자 리모델링을 거쳐 2가 넘는 대규모 서고로 재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부산기록관은 과거사와 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박물관으로 보면 된다. 기록은 그 자체가 역사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 세대를 뛰어넘어 미래세대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서가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록만큼 

세월의 더께가 더해지고 있는 곳이 부산기록관. 영남권 유일의 중앙기록물 관리기관이 바로 이곳이다.

역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저 유명한 

정의를 보라.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알고자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역사에서 현재 우리의 삶에 놓여진 

많은 당면 과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의 역동적인 흐름이 역사인 것이다

그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생존과 번영에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그러니 부산기록관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 만하지 않나.


 

모조 광개토대왕비가 부산에 온 까닭은?

 

부산기록관에 들어가려면 꽤 까다로운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착용하고 

들어가서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돼 있다. 기록관 앞마당과 본관 1층 오른쪽에 있는 기록문화역사실이 

전부. 국가 중요시설로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다. 그러나 이 정도만 꼼꼼히 살펴도 본전은 건지고도 남는다.

기록관을 들어서면 본관 왼쪽에 높이 6m에 이르는 커다란 비석이 보인다. 진품이 아닌 모조 광개토대왕비다

이게 부산기록관에 서 있게 된 연유가 흥미롭다. 모조 광개토대왕비는 원래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정원에 

있던 것으로, 2008년 가을 부산기록관으로 옮겨졌다. 이 비는 1990년대 말 이종찬 전 국정원장 시절 

만들어졌다. 당시 안기부국정원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 이 전 원장은 광개토대왕의 패기를 닮을 것을 

주문하며 모조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짙은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석이 들어선 이후 소위 

국정원 잔혹사가 시작된 것. 이 전 원장이 언론 장악 시나리오 유출 파문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데 이어 

임동원, 신건 전 원장 등이 줄줄이 실형을 선고받는 등 국정원의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국정원 내에서 비석

 반대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능비를 건물 앞에 세워 수난이 잇따른다는 거였다.

비석은 전격적으로 옮겨졌다. ‘행정 박물(博物)’로 분류된 비석은 법적으로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게 돼 있기

 때문에 부산행이 결정됐다.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국정원이 비틀거리고 있는 걸 보노라니 비석과의 악연설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원히 빛날 민족의 보배, 조선왕조실록!


부산기록관이 보관 중인 기록물 중 핵심은 단연 진본 조선왕조실록’. 한국의 대표적 기록유산이자

199710월 유네스코에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의 기록을 편년체로 기술한 공식 국가기록이자 조선시대 판 타임캡슐이다. 단일 왕조 기록으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기록유산의 챔피언으로 손색이 없다. 태종 때 코끼리가 처음 들어왔다가 사람을 죽여 

외딴 섬으로 두 번이나 귀양 간 이야기, 궁궐에 출현한 귀신 소동(현종),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 등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의 보고가 조선왕조실록이다. 특히 장금(長今)은 실록에 6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장금은 드라마 속 궁중음식의 달인과는 거리가 먼 약재에 밝은 전형적인 의녀로 나온다.

 ‘중종실록에 보면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지자, 왕이 약방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의녀 장금에게는 

쌀과 콩 10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부산기록관에 보관된 실록은 태백산사고본. 임진왜란 때 전화를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이 

아니었더라면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때 실록을 보관했던 조선의 사고 4곳 중 3곳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나마 전주사고 한 곳만 

이 땅의 민초들이 힘을 모아 지켜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접할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선조 25(1592) 427일 성주를, 다음날 충주를 함락시킨데 이어 파죽지세로 

진격해 52일 도성 한양을 수중에 넣었다. 4대 사고 중 성주, 충주, 춘추관 사고가 모조리 불탔고 사료들은

 잿더미로 화했다. 남은 곳은 오직 한 곳, 전주사고뿐.

전주사고 살리기 대작전이 시작됐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61447, 기타 전적이 64556책 

15궤가 봉안돼 있었다. 전주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다급한 상황에서 선비 손흥록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흔쾌히 승낙한 그는 고향친구 안의와 조카, 하인 30여 명과 함께 전주로 달려가 64궤짝이나 되는 실록과 기타 

전적들을 말 등에 싣고 정읍을 거쳐 내장산으로 향했다. 그들이 닿은 곳은 내장산 은봉암. 지금의 금선폭포 

주변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태조 어진을 좀 더 깊은 산중, 지금의 용굴암으로 옮겼다. 이듬해 7월 왕명으로

실록이 정읍현청으로 옮겨지기까지 내장산에 머무른 기간이 무려 383일에 달했다. 유일하게 남았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이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며 온전히 지켜냈다. 실록은 정읍현청에서 선조가 피신한 

해주로 이송됐고, 이후 영변 묘향산으로, 강화도로 옮겨지는 고달픈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조 36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이 다시 네 벌로 등사돼 정족산과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등 깊은 산속에 마련된 사고들에 봉안된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학습효과의 결과, ‘깊은 산 속으로 

숨다로 나타난 것이다. 후일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는데 현재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고, 오대산본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으로 가져갔으나 간토대지진 때 788책 중 74책을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는 참화를 겪었다. 현재 국내에는 정족산본(서울대 규장각 소장)과 태백산본이 남아있으며 그 중 

태백산본이 부산기록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역사수호의 정신을 엄숙히 

기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태백산사고본에 얽힌 스토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 역사학자 오항녕이 쓴 조선의 힘에 부산 태백산사고본을 접한 감동의 순간과 실수 이야기가 

나온다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의 전문위원으로 임용된 뒤, 나는 부산지소에 출장 가서 

실록이 보관된 서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오동나무 상자에 태백산본 실록이 담겨 있었다. 종이가 어찌나

 깨끗한지 마치 엊그제 인쇄한 듯했다.

서고문을 열고 들어가 실록을 처음 접했을 때 온몸을 휘감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한 장, 한 장 실록을 

넘겨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지의 찰진 부드러움과 그 손끝으로 활자를 타고 들어오는 정령(精靈)

그해 겨울 서늘한 서고에서 그렇게 실록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만 실록을 처음 보는 흥분에 도취되어,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책장을 넘긴 것이다. 사람의 손에는 우리가 보통 소금기라고 부르는 나트륨과 암모니아가 섞인 땀이 배어나게 

마련인데, 이 땀 때문에 종이가 쉽게 부식된다. 그래서 종이 기록을 만질 때는 꼭 장갑을 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몰상식했다. 당연히 안내하던 직원은 우리에게 장갑을 주었다. 그런데 그립던 님을 만난 나는 

기어코 규정을 무시하고 맨살을 만져 보았다. 저 하나의 님이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만, 많은 사람의 님을 

탐했으니 죄가 무겁다. 그래서 이 일을 고백해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한다’.

부들부들 떨면서 깨끗하기 그지없는 실록의 책장들을 넘겼을 저자의 격동에 찬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얼마나 감동했으면 장갑 끼는 걸 잊어버렸을까.

이처럼 진본 실록은 엄청나게 보존이 잘 되어있다. 물론 항습과 항온 등 실록의 훼손을 막는 첨단 기술도 

큰 역할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지극 정성과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실록이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은 포쇄(曝曬)’라는 의식에 있다. 포쇄란 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볕에 말리는 것이다. 대략 2, 3년 주기를 두고 포쇄가 행해졌는데 대부분 청명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늦가을인 

음력 9~10월이 적기였다.

조선후기 문신 신정하(申靖夏)1709년 가을 포쇄관으로 임명되어 태백산사고에 포쇄를 갔다온 이야기를 

태백기유(太白紀遊)’에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사각(史閣)은 담장을 쳤고, 담장 동쪽에 사관이 포쇄할 때 머무는 연선대라는 건물이 있다. 사각에는 번을 서는 

참봉과 이를 지키는 승려가 늘상 머문다. 사각에 이르면 네 번 절한 뒤 자물쇠를 열고 봉심(奉審=받들어 살핀다)

한다. 포쇄는 사흘 간 하였는데 늘 날씨가 맑았으며, 이 때 포쇄한 서적은 서른여섯상자이다. 포쇄가 끝나면 

서적을 상자에 담아 사각의 누옥에 넣고 전처럼 봉인한다’.

신정하는 포쇄를 담당한 사관에 임명된 것에 신이 났던지 포사(曝史)’라는 시도 지었다.

임금의 조서를 받들고/ 가을바람에 말을 달려왔네/ 네 번 절한 뒤 손수 자물쇠를 열고서/ 연선대 가에서 

포쇄를 하네/ 귀한 상자 서른여섯 개를 내놓으니/ 해가 하늘 중앙에 이르렀네/ 지나는 바람에 때로 함께 책장을

열고/ 날던 새가 갑자기 책에 그림자를 남기네/ 때때로 서적 가운데서/ 시시비비를 스스로 깨닫네.’

왕명을 받고 포쇄를 담당한 사관의 엄숙한 심정과 드높은 명예감을 한껏 드러낸 운문이라 하겠다

조선조에서는 이처럼 실록을 엄청나게 공들여 관리했던 것이다.


그 외의 자료들


부산기록관에는 실록을 비롯한 국보급 역사기록과 함께 대통령 기록물, 외교문서, 영남권 공공기록물,

전자디스크, 마이크로필름 등 각종 매체 원본이 보존돼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지적 원도와 당시 잡범들의 

기록, 독립운동가 판결문 등 희귀자료가 수두룩하다. 가히 자료의 보고라 할 만하다. 201610월에는 

63점의 희귀사진들을 발굴, 공개해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의 '피란수도 부산 기록 찾기 

공모전'에서 19531월 발생한 부산 국제시장 화재 사건 이전의 시장모습과 광복동 거리풍경, 천막교실과

 운동회모습, 맥아더장군 퇴역 후 새로 부임한 아이젠하워 장군 환영대회 등도 당시의 생생한 역사현장을 

규명하는데 매우 귀중한 기록물이 발굴됐다. 폭염의 계절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지금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 소중한 역사문화 자산을 찾아가 공부하자

기록관을 둘러보며 선조들의 얼을 되새기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나.


이순 최원열 기자 choiwonye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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