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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사 - 한산대첩축제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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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8-27 조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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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사 - 한산대첩축제 현장을 가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배사)’ 부산지부는 지난 811일부터 812일까지 통영에서 열린 한산대첩축제를 팸투어로 다녀왔다. 지금 한산대첩을 되새겨 보려는 것은 한산대첩 426주기를 맞아 오래된 미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임진왜란(1592-1598)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가 대륙정복의 야욕을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1592)에 모두 4차례 출전하여 일본수군과 10번의 주요 해전을 치러 모두 완승하였다. 한산도해전은 이 중 제3차 출전 때인 159278(양력 814)에 치렀던 전투로, 조선과 일본의 수군이 임진왜란의 해상주도권을 다툰 중요한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수군은 일본함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한산대첩축제 행사는 학술세미나, 한산대첩 재연행사 등으로 이어졌다.  

 

한산대첩 관련 학술세미나

    

 

학술세미나는 임원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이순신리더십연구소 소장) 소장의 진행으로 이루어졌다. 주제발표 및 토론은 각각 정진술(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석좌교수) 교수의 한산도해전의 경과와 의의”, 제장명(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소장) 소장의 한산도 통제영 시기 수군 운용과 주요 해전”, 김일룡(통영문화원 원장) 원장의 한산도의 임진란지명 연구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 정진술 교수가 주장하는 한산도해전 승리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조선점령 야욕을 좌절시켰다. 둘째, 조선의 전쟁지속 능력이 유지되었다.

- 제장명 소장의 주장은, 어려운 현실에서 수군을 운용해 나가면서도 한편으로 일본군의 서진을 막아야 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조일간의 해전이 많았던 시기는 개전 초기인 임진년 5월부터 9월까지와 정유재란기인 1597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나머지 기간은 강화교섭기로서 이 시기에도 조선과 일본 간에는 간헐적으로 해전이 벌어졌다.

- 김일룡 원장의 주장은, 그동안 임란사와 한산대첩에 관한 연구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충무공의 한산진과 한산도지역의 옛 지명들은 아직도 제대로 집대성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껏 알려진 지명유래설 또한 민간어원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래의 토박이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그 소리()나 뜻()을 차용한 변이된 한자지명을 다시 한자로 직역하여 풀이함으로써 본래의 땅이름과 사뭇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다. 김 원장의 연구는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기자 개인에게는 참신하게 다가온 발표였다.

 

한산대첩 재연행사

 159278일은 임진년 전쟁사 중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대첩이 치러진 날이다. 오늘 한산도 앞 바다에서는 그날의 한산대첩 재연행사가 치러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한산대첩 재연행사에다 임진년 한산대첩의 다음 전개과정을 오버랩 시킨다면 임진년 한산대첩의 현장감이 보다 생생하게 되살아나리라 생각되었다.

 

      

이순신은 왜적선 70여 척이 미시(오후 2시쯤)에 거제 영등포로부터 견내량으로 와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순신, 이억기, 원균 세 장군의 연합함대 56척은 적들이 정박하고 있던 견내량을 향해 나아갔다. 한 바다에 이르러보니 왜적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 조선 함대를 보고는 바로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탐선이 뒤쫓아 가보니 과연 그곳에는 73척의 왜선이 대열을 벌린 채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지형을 살펴본 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적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해 섬멸시켜야겠다고 결정했다. 첫째,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 수십 척이 일시에 들어갔다가는 서로 부딪칠 염려가 있는데다, 그곳에서는 배를 빨리 쉽게 돌리기가 어려워 전술상 불리했다. 둘째, 인근에 숨을 수 있는 육지와 섬들이 산재해 있어 적들이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도망가 숨기가 쉬워 일망타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전략을 그대로 시행했다.

먼저 판옥선 5~6척에게 일부러 적을 덮쳐잡을 듯이 진격하도록 했다. 그러자 적 함대가 분격해 일제히 돛을 달고 따라 나왔다. 적들이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진격한 5~6척이 후퇴하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조선함대도 모두 돌아서서 도망가는 척했다. 적선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조선수군을 추격했다. 한참 정신없이 추격해온 적선들은 어느새 한산도 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로 이때, 연합함대는 서로 약속한 신호에 따라 어느 한 척도 지체하지 않고 번개 치듯 배를 돌려 학이 날개를 펼치듯 삽시간에 적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바로 학익진이었다.

갈팡질팡하는 왜적선단을 포위하여 한 곳으로 모아놓은 조선수군은 좌우 2척의 거북선을 앞세워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의 중화기를 적진 심장부로 무차별 퍼부으며 들어갔다. 집중사격을 받은 적의 선봉장 2~3척에는 어느새 불이 붙었다. 사기가 꺾인 왜적들은 달아나려 했지만 학익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대첩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적이 본시 수륙으로 합세해 서쪽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인데 이 전쟁 한 번으로 적의 한쪽 팔이 잘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을 얻었지만 형세가 외롭고 약해져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라, 충청으로부터 황해, 평안의 연해일대를 확보해 군량보급과 호령 전달로 중흥을 이룰 수 있었고, 또 요동의 김주, 복주, 해주, 개주, 천진 등까지도 동요하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 모두가 순신이 승첩한 공로라,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한산대첩(3차 출전)은 제4차 출전인 부산대첩(159291)으로 이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연락, 보급기지로 이용되던 부산포의 소굴들을 공격해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부산대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장계를 직접 써서 선조임금께 올렸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전후 네 차례,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이 승첩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 봤자 70여 척을 넘지 못했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이 늘어선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며 두려워서 벌벌 떨게 했습니다.


이순신 리더십

오늘날 李舜臣 정신 및 이순신 리더십이 급부상하며 주목받는 이유는 왜일까?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의 저자)지금의 사회는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형적인 사회라며 사회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성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발전해야 하는데 그 해답을 이순신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김 전 재판관은 "이순신 장군 하면 최고의 전략가로 냉정하고 엄격한 장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항상 전투에 앞서 백성의 생명과 안위를 먼저 생각했고 정성을 다해 바른길을 가고자 한 분이었다", 이순신 정신을 사랑, 정성, 정의, 자력4가지 가치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주정호 김진옥 기자 aceof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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