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조메뉴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바로가기

상담문의

베이비부머 칼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프린트

통도사 원종제일대가람 유래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8-05-20 조회 1927
첨부

통도사 원종제일대가람 유래  

      

불기 2562년 석가탄신일을 앞둔 휴일 오후...

1980년대부터 시작한 기자 생활 중에서 불교와 연관된 여러 취재 일화는 탐진치(貪瞋癡)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천수경(千手經)의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이 세상에 와서 언론인으로 살아오며 입으로 지은 죄가 너무 많았던가? 언론은 언정논치(言政論治)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언론관은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며 대의를 위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는 선비의 기개와 같은 것이라고 배웠다. 80년대  주기자(죽이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나의 말과 글로 인해 적발되어 패가망신한 사례가 많았은데 기사는 칼의 양날과 같아서 기사로 인한 피드백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19892월은 국제신문이 8년 만에 복간이 되어 기존 언론들과 기사 경쟁을 해야 할 무렵, 기자는 당시 양산군(현재 양산시와 기장군)을 출입하며 부산에서 동면 물금읍 양산읍 군 소재지와 상북면 하북면 통도사, 웅상읍 철마면과 기장읍 국립수산진흥원, 장안읍 월내 고리원자력발전소, 일광면 등의 양산군 동부출장소 관내 5개 읍면을 해안도로를 따라 3개 코스로 나눠 거의 매일 순회하면서 취재를 하였다.

 사진설명: 1989년 2월 당시의 기사 스크랩 북과 원고지


이에 앞서 19805공 군사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11라는 신문방송통신사 제도로 중앙일간지들의 부산 경남지역 주재기자가 상주하지 않았던 8년간의 세월이 지난 후 처음으로 양산을 출입하게 된 기자의 눈에는 양산군 전역에 특권층의 불법 행위가 만연돼 있어 마치 복마전(伏魔殿)이 아닌가라고 통탄하게 되었으며 정의감과  발로 뛰는 기자정신에 사로잡혀 토착비리와 특혜, 방위산업체, 원자력발전소, 비전향 장기수 등에 대해서도 취재하였으나 상당수 기사는 시의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취재가 금기시 된 영역까지 보도하자 기존 관료, 기자들에게 따돌리기 일쑤였으며 기사로 인해 피해를 입은 특정인들이 평소 학교 선후배 등으로 인맥이 있는 신문사의 사장 국장 데스크 선배 동료 기자 등에게 불만을 토로하면 기사로 인한 후유증은 결국 기자가 모두 안게 되었다.

 

당시 통도사 방장인 월하 스님을 인터뷰를 하면서 서예작품들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는데 잦은 이사 탓인지 건망증 탓인지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통도사를 취재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월하 큰스님에 대한 기억이다. 월하 스님을 인터뷰 한 후 당시 불교계의 고승이었던 성철스님, 일타스님에 대한 취재를 하게되어 기자가 불교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4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통도사의 초대(初代) 방장(方丈)으로 자리한 월하대종사는 정변전에 주석(住錫)하며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방문자(訪問者)들을 맞았다. 대종사가 늘 보여주었던 수행자의 모습은 늘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百丈淸規에서 어긋남이 없었다. 자신의 방청소와 빨래는 손수 자신이 하였으며 새벽 3시 반 예불에서부터 대중과 더불어 공양을 하였고 경내 청소 등 운력(運力)에도 빠지지 않는 등 自悟自證하는 규범을 보였다. 이러한 대종사를 가리켜 대중들은 百丈淸規趙州의 수행가풍을 실천한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항상 근엄하면서 쓸모없는 귄위(權威)를 버리고 노유와 어울리는 친화력(親和力)을 가지신 분이 月下 대종사였다. 오늘날 佛之宗家인 통도사의 가풍은 구하, 경봉, 벽안스님에 의해 이어져 다시 스님이 이를 전수(傳受)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월하 스님이야말로 근대(近代) 통도사(通度寺)의 역사(歷史)이고 산증인이다."

 

대종사는 하심(下心)의 자애(慈愛)가 몸에 밴 분이었다. 대종사는 법()을 구하려고 오는 운수납자(雲水衲子)에게는 格外禪旨를 보였고 모든 佛子들에게는 常不輕菩薩下心慈愛를 베풀어 자신들의 본분(本分)을 깨닫게 하였다.

 

이렇듯 월하 대종사의 자상함은 비록 부드러울망정 理事達觀하고 隨處作主의 광활한 德目確保하는데 장애(障碍)가 되지는 않았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라." 기자도 양산을 1 년도 채 못 채우고 떠난 후 2000년대 김해에 거주할 시기인 40대부터 가장 즐겨 쓰고 암송한 임제록의 법문을 실천하고자 다짐해 본다.


통도사의 현액 중에는 중국 명나라의 시조인 주원장의 필체가 있다.

"불이문(不二門)1305(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 重)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대들보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태를 삼각형으로 짜 그 부재 위에 장혀(長舌)를 걸 쳐 중도리(中道理), 하중도리(下重道理), 종도리(宗道理)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중국 명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

 

"불이문 현판에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이라는 글씨는 송()나라 미불(米連 : 元章)의 필이다. 이것은 통도사가 한국불교의 근원으로서 불교의 근원이고 근본인 계율중심도량이고,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최초에 설법하신 화엄도량임을 모두 포함한 함축성 있는 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이 통도사 불이문 현액을 써준 것도 아닐진데 주원장의 필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명나라를 사대주의로 섬겼던 조선은 여말선초(麗末鮮初) 태조 이성계와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 등이 건국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핍박받았던 승려들이 산사로 모이면서 사찰을 보호가기 위해 조선이 섬겼던 명나라 시조 주원장의 글씨체를 집자(集字)해 제작한 현액이 바로 <源宗第一大伽藍>이 아닐까?


주원장은 호주(濠州)의 한족 빈농가문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 홍건적(紅巾賊) 참여해 홍건적의 부장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1366년 스스로 명왕이라 칭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킨 뒤 1368년 스스로 자립해 황제에 올라 대명을 건국했다. 이후 그는 한족 왕조 회복의 기치를 명분으로 하고, 지방관의 행정, 입법, 군사 권한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중서성을 혁파하고 6부 상서들에게 직접 결제받는 등,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황권 강화를 꾀하였다.

반원, 반몽골과 한족의 국가 재건을 기치로 북벌군을 일으켜 직접 지휘, 1388년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왕조 성립 뒤에는 지역 토호 및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지방관 파견과 제후국 봉지 임명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시켰다. 또한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자급자족 농경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해 14세기 한족 중심의 중국을 건국했던 것이다. 

 

주원 김영수 기자 lymanjoo@naver.com      

댓글

  •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 타인을 비방하거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