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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 관현악단과 음악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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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2-17 조회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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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 관현악단과 음악정치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한 삼지연관현악단이 구랍 세간의 화제였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던 여든 살의 노회한 김영남이 끝내 눈시울을 적셨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문대통령에게 전달한 김정은의 방북요청 친서를 전달하는 과정을 보면서 음악을 통한 북한의 정치를 분석해 본다. 


삼지연관현악단은 모란봉악단, 청봉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국가공훈합창단 등의 북한 예술단에서 선발된 연주자와 가수, 무용수가 추가 편성돼  28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 11일 서울 국립중앙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반갑습니다>, <백두와 한라는 내조국>, <다시 만납시다> 등의 북한 가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홀로 아리랑> 등 한국 가요, <오페라의 유령>,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 등 외국 음악, <모차르트 교향곡 40>, <백조의 호수>, <라데츠키 행진곡> 등의 클래식 음악이 연주되었다. 11일 공연에서는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 서현이 출연, <우리의 소원>을 열창하는 등 남북합동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북한판 인기 걸그룹인 모란봉악단 공연 모습   


북한은 우리와 같은 뿌리의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음악 양상이 무척 다른 이유는 북한 사회주의 철학인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성악곡의 비중이 크다는 점과 노랫말 속에 사회주의 철학사상과 관련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 조선조 전통음악인 판소리가 사라진 대신에 <피바다식> 혁명가극으로 변용된 점 등이 상이하다.

 

북한에서 민요풍과 일제강압기 불렸던 계몽기 가요 등이 널리 보급되고 있는 반면, 판소리가 점차 사라진 사연은 음악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김일성은 판소리가 갖고 있는 두 가지 결합으로 첫째, 판소리는 양반들의 노래 곡조라는 점과 둘째, ‘쐑소리를 낸다는 점을 지적했다. 1964년 김일성이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행한 이후, 북한에서 판소리는 점차 자취를 감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20세기 각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철학이 있었고, 그 철학들이 모여 주체사상을 완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은 어느 한 시점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프롤레타리아운동, 1926년 김일성의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시작으로 해방과 분단 이후 북한이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8월 종파사건 등이 주체철학의 태동된 배경이다. 이후 황장엽이 소련 유학을 마치고 1953년 북한에서 활동을 시작해 197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김일성주의가 정립되었다.              

 

북한의 문학과 예술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발현된 창작 활동이라기보다는 당국이 지향하는 이념을 전달하는 선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문학과 예술작품은 국가의 독점적 통제 하에 미를 추구하는 대신 당성·인민성·계급성을 강조한다. 북한의 문학예술은 문학을 비롯한 음악·미술·공연예술 등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용어이다.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 현송월의 <준마처녀>, 김정은 부인 리설주가 불렀던 <내 이름 묻지 마세요>, <아직은 말 못해> 등과 같이 북한에서 대중가요 풍의 생활가요가 등장한 것은 1992년 김정일 등장 이후이다. 김정일은 북한 체제를 밝고 명랑한 사회로 묘사하기 위해 그동안 금기시해왔던 것을 일부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활가요는 빠른 템포와 서구의 팝 음악적 요소가 가미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 사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탈북 가수들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한 북한의 대표적인 생활가요 <도시처녀 시집와요>, <반갑습니다>, <휘파람>, <녀성은 꽃이라네>, <나의 어머니>, <축복하노라>, <처녀시절>, <나의사랑 나의행복> 등은 한국에서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김정일은 지난 1982년 말 만수대예술단 음악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 시대의 음악의 사명은 정치를 정서적으로 안받침(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음악을 모르면 정치를 못한다.”고 했다. 특히 김정일은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에게 혁명무력의 나팔수역할을 수행하도록 임무를 맡기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연을 관람했으며 인민군 부대 예술선전대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정일의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음악정치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정치는 기존의 인덕정치·광폭정치·선군정치·과학중시정치에 새롭게 추가된 것으로 200027일 평양에서 열린 인민무력성(인민무력부) 집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날 집회에서 조명록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인민군 고위 장성들은 토론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그 어느 시대에도 있어보지 못한 우리식의 특이한 음악정치가 펼쳐지고 있다면서 온갖 시련과 난관을 노래로 이겨내며 강성대국 건설을 힘있게 다그치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 기상은 김정일 동지의 음악정치가 가져온 자랑찬 결실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정치에 대해 선전해 왔는데, 그 핵심은 김정일이 음악을 사상이나 총대처럼 중시하고 음악을 통해 전체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그 위력으로 혁명의 승리를 이룩해왔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음악은 때로 수천, 수만의 총포를 대신했고 수백, 수천만 톤의 식량을 대신했다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의 음악정치는 김정은 시대에도 중요한 선전·선동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의 3대 후계자인 김정은의 등장을 처음 알린 것은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 중에서 가장 먼저 발표된 <발걸음>2009109일 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에서 합창되는 장면이다. 이후 <발걸음> 노래는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이 신년음악회에서 합창곡으로 연주되는가 하면, 모내기 작업 중 휴식 시간에 인민을 대상으로 <발걸음>을 지도하는 장면이 방영되었으며 각종 스포츠대회와 수중발레, 태양절 행사 음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은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정철, 정은, 여정을 어릴 적부터 간부들에게 소개하고 생일날 모여서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1992년 김정은의 아홉 살 생일 축하곡으로 <발걸음>을 만들어줄 당시, 김용순을 비롯한 간부 다수가 모였다고 증언하였다.

 

김정은 체제 이후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에서 모란봉악단의 여성 5중창과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합동공연에는 북한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연주되었다. 이는 북한이 말하는 사회주의 대가정에서는 수령(영도자)어버이, 조선로동당이 어머니, 그리고 인민이 자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북한음악 중에서도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은 송가(頌歌)와 당정책풀이가요, <피바다>식 혁명가극 등이다. 이중 <피바다>식 혁명가극은 그 규모와 전혀 다른 형식의 느낌 때문에 새로운 장르의 가극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오페라나 오페레타 등과도 다르며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 등과 같은 극예술과도 또 다른 형식이다.

 

20세기 지구촌의 음악 정치는 잔혹사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은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죽어야 했다. 히틀러는 나치독일의  선전상인 괴벨스를 통해 유대인 집단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여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었고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바그너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최후를 맞아야 했다.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베를린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혼례의 합창을 작곡한 음악가이자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등을 만들었다. 24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자 영화 반지의 제왕모티브가 된 니벨룽의 반지까지 게르만 민족의 영웅담인 신화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오페라를 작곡하며 크게 성공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 히틀러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베를린 중고등학생 6,000명을 동원해 대합창곡으로 연주해 나치당이 평화와 독일인의 화합을 선도하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선전하였다. 나치 시대의 베토벤 음악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연주돼 군대 행진곡은 물론, 수용소 유대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향하여 걸어갈 때도 베토벤 음악이 연주되었다.  나치 시기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호르스트 베셀 리트> 노래나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우미유카바>(海行かば/うみゆかば)는 당시의 끔찍한 히트송이었다

북한에서 활동했던 탈북가수는 권총은 한 사람의 심장을 뚫지만 음악은 천 만명의 심장을 뚫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원 김영수 기자 lymanj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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