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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로 승부를 걸어라
(주) 보광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8-08-17 조회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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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화순인’ ()보광 윤영갑 대표

기술로 승부를 걸어라!”

 

그는 선한 화순인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정겹고, 표정 또한 푸근하다.

전남 화순산인 보광 윤영갑(61) 대표.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을 찍고부산으로 내려왔다.

서울 가구업체에서 일하다 부산에 내려온 게 1980. 전통살문의 하나인 완자살문 제작 기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울과 부산의 가구 기술이 10년 차이가 났어요. 서울에서는 완자살문을 가르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타향인 부산으로 무작정 향했습니다.”

완자살문은 완자무늬()를 넣어 살을 가로세로 넣어 짠 문으로, 무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에

결실과 장수, 행복 등 좋은 일을 상징한다. 전통 가옥 안채나 사찰 창호문에 많이 쓰였다.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기에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다.

윤 대표는 1998년 외환위기 때 김해에서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녹산공단으로 들어왔다.

주위에서 나라 전체가 어려운데 힘들 거라며 만류했지만 내 공장을 갖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결단을 내렸단다. “당시 땅값이 평당 55만원 선으로 비싸지 않을 때였어요. 은행 빛을 내지 않고 현금으로 샀습니다.

고향집에 달려가 통사정을 해서 겨우 5천만 원을 들고 왔죠.”


그토록 어렵사리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는 전문 인테리어가 아닌 관급 목재가구와 창호 인테리어를 취급한다.

 주로 학교 교실 문이나 아파트 나무방문 등 목재 가구를 만든다. 남들은 한가할 때인 방학철이 가장 바쁘다.

 직원 15명이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접한 회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제작에서 시공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하는 전문건설업체다. 조달청 입찰을 통해 부산 경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시장을 넓혀나가는 강소기업이기도 하다.

보광이 전국 시장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가 있다. 비록 덩치는 작지만 KS마크와 친환경 인증을 갖고 있기 때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회사는 매우 드물다. 전국적으로도 단 13개 밖에 안 된다.

그러니 입찰에서 경쟁력을 갖는 건 당연지사.

윤 대표의 명함을 보면 더 베스트(THE BEST)’가 가장 먼저 적혀 있다. 최고의 기술로 승부를 내겠다는 거다.

실제로 그는 베스트를 향한 열정이 대단하다. 이 분야에서 어지간한 사업체는 꿈도 못 꿀 KS마크를 따낸 게

 좋은 사례다. “준비에 1억 원, 인증 획득에 5000만 원이 들었습니다. 또 유지 예산이 연간 1000만 원에 달합니다.

그러니 어지간한 업체에서 인증을 얻을 엄두가 나겠습니까.”

윤 대표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 따낸 전문건설 면허만 11개에 달한다.

3년 전에는 현 공장 옆에 1300평에 달하는 제2공장을 지었다. 그뿐 아니라, 창호 관련 회사를 3개나 더 설립했다.

말하자면 그는 소그룹 회장인 셈이다. 지난해 사내 연구소를 만들어 내년부터 국가과제를 떠맡겠다는 대박

희망에 부풀어 있기도 하다.

품질, 혁신, 협력, 환경이란 문구가 회사 사무실 가장 잘 보이는 벽면에 붙어 있다. 보광이 지향하는 목표다.

 품질과 혁신, 환경은 앞서 설명했다. 그러면 협력은? 윤 대표에게 협력은 전 직원이 똘똘 뭉쳐 일함으로써

 작업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해야 직원들을 뭉칠 수 있을까? 윤 대표는 주저 없이

 상대 배려하기를 꼽았다. 동생은 업무를 총괄하고, 다른 직장 다니던 아들도 데려와 함께 일한다.

가족애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직원을 내 동생, 내 아들처럼 대하자는 마음은 행동에 그대로 묻어난다.

직원들의 근무연수는 평균 10년을 넘는다. 그만큼 직장을 믿고 편안하게, 하지만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17년차 박미진 부장의 말을 들어보자. “결혼 후 가정생활을 해야 하기에 오전 8시 출근이 빠듯해서 사장님께

말씀드리니 흔쾌히 ‘9시까지 나와라고 하시더라구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윤 대표에겐 한 가지 불만과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있다. 먼저 불만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현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다. “투자에 힘 쏟고 정상적으로 세금 내는 기업과 무면허에 세금을 안 내는

기업이 경쟁하면 누가 유리할까요. 기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저가 수주에는 당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반드시 마련돼야 합니다.”

그에게 아로새겨진 고통의 흔적은 뭘까. 바로 영호남 차별 의식이다. 사실 그는 고향 화순보다 부산에서 훨씬 오래

살았다. 부산이 고향과 다름없지만 호남 말씨로 인해 그는 사업 초창기 혹독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신설 학교 공사 계약이 거의 다 됐는데 갑자기 양보하라고 합디다. 아예 술자리에도 부르지 않을 정도로

왕따를 시키더군요.”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인맥, 학력, 지연 등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가방끈

없으니 오직 뛰어난 기술을 믿고, 좋은 제품을 약속한 기일 내에 넘겨주는 것만이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는 말없이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이제

도약의 단계에 올라섰다.

인생 철학을 묻자 거침없이 비움의 미학을 강조했다. 그가 라이온스클럽과 장학회 등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비움의 미학이란 채움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같다.

일찍이 노자가 갈파하지 않았던가. 받으려면 먼저 주고, 채우려면 먼저 비우라고. 그렇다.

 지금 우리는 더 비우고 덜 채워서가 아니라 덜 비우고 더 채워서 문제다.


이순 최원열 기자 choiwonye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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