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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박사의 나눔 그리고 ......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9-08-29 조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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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박사의 나눔 그리고 ......


  부산역 맞은편 초량 이바구길 을 따라  꼬불꼬불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 가면 담장 갤러리 를 지나고 이바구길 우물터와 168계단이 길게 펼쳐진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많은 168계단을 보고 탐방객들은 와~하고 함성을 지른다. 저 계단을 올라갑니까? 하고 묻는 이방인에게 자주 답하곤 하였지만 지금은 168계단 옆에 모노레일이 생겨 아주 수월 하게 오를 수 있다. 급경사 지역에 이렇게 계단이 많은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이 많다. 산복도로에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했던 시기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다.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부산역 종착역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곳 평지공간이 부산은 많이 없는 터라 산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지금의 산복도로에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된 이유이기도하다. 그때는 부두 노동자들이 산복도로에 많이 살았는데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면 선착순으로 인원을 마감했던 시기라 일감을 얻으려면 빨리 가야 그날 하루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 했던 터라 168계단은 산복도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계단이기도 하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부산의 북항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부산여객터미널과 부산역이 바로 앞에 보인다. 부산역에서 걸어 올라온 길을 보며 산복도로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보고 또 한 번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 탄성을 뒤로 한 채 168계단에서 우측 내리막길 후비진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빨간 지붕의 ‘장기려 박사기념 더 나눔 센터’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아온 봉사자 장기려박사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의술로 인술로 베푼 가난한 사람들의 의사였다.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인물은 아니지만 부산을 터전으로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면서 진정한 봉사의 삶을 살다간 참의사로 존귀하게 여기는 분이었다.


그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 1928년 개성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졸업(현서울대의과대학) 1940년일본 나고야국제대학 의학박사 학위취득 (급성 중추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을 성공 하였다. 간의 윗 조각을 떼어내는 수술로 당시 불가능이라 했으나 성공 하였다. 1947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다가 1950년 부산 육군병원 외과 근무 중 구급차에 응급 환자를 진료중 이었기에 둘째 장가용씨 만  아버지한테 와 응급차를 탔고 부인과 딸은 피난길에서 보았으나 응급진료중이라 태우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평생을 못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가족과 이별하고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온 그는 1951년 1월 부산 영도에 복음병원천막진료소(현 고신의료원의 전신)를 개설 하였다. 부산의 피난민과 행려 환자들을 위한 진료를 시작 UN군의 지원으로 복음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피난민을 무료 진료 하면서 인술을 펼치기 시작, 우직스럽게 무료병원을 계속하며 아미동에 있는 부산의대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다. 1959년 한국최초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다. 우리나라 의학계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의학회에서 이 공적을 기려 매년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가 된 계기이기도 하다. 1976년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로도 부산 동구 수정동에 청십자 병원을 설립하여 무료진료와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계속하며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다. 1979년 8월31일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수상 하였으며, 실제적이고 헌신적인 사랑과 한국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에 관한 공적으로 이 상을 수상 하였다. 한 평생 나눔을 실천하며 산 장기려는 국민훈장 동백장(1976), 적십자 인도장 금상(1976), 막사이사이 사회봉사부문(1979) 등 각종 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1996)이 추서되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간 외과학의 선구자 그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 하였으며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암환자를 대량 간 절제술로 완치시켜 한국 간 외과학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수술에 앞서 수많은 동물실험과 시신해부를 통해 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고 출혈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간엽을 8구역으로 구분하여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하였다. 이후 1961년 대한의학회에서 대통령상인 학술상을 받으며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의 수술법은 외과의들에겐 교과서로 통하고 있다. 훗날 이 날이 간의 날로 제정되어 의학계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는 ‘의사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라는 신념대로 살았던 장기려는 참의사였다.


 6.25전쟁 중인 1951년 부산 영도에서 무료의원을 개원 한 것도 그의 선한 의사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변변한 봉급 한 번 받아보지 못하였으나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 했다. 병원비가 없는 사람에게 직원들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기도 하였으며, 오랜 병원 생활로 영양보충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처방전에 닭 두 마리 일화도 유명하다. 바보의사,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 모두가 존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의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알았다. 그에게 있어 의술은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명예도 물질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존경해야 할 까닭이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를 기념하고 지역주민들의 건강지원사업 및 정서함양을 위해 조성된 더 나눔 센터에서는 살아 있는 나눔 실천 공간이다. 2013년 4월1일 개원하였으며 1966년 4월1일 복음병원 초량분원 개원일 기념일에 이곳에 문을 열었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1차년도 사업의 일환으로 지상2층으로 장기려 박사의 인간존중 철학이 있는 보건, 복지, 문화 복합공간으로 마음 나눔방, 건강나눔방, 동화책 작은 도서관, 북카폐, 일자리나눔방이 있다. 마음나눔방은 방문자 안내센터 뿐만 아니라 낙후지역 생활서비스 개선을 위한 마을지기사무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건강나눔방은 한방무료진료, 이동물리치료, 치매예방 등 각종 정신교육 프로그램과 근력강화, 운동, 탁구, 요가, 등 각종 건강관련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동화책 작은 도서관은 아동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에게 동화책을 통해 고단한 삶에 대한 치유와 늘그막 책을 읽는 즐거움으로 새로운 인생설계지원 구연동화자격증반 개설로 구연동화자격증취득과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에게 책을 읽어드려 동화책으로 마음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북카폐 는 동네휴식공간으로 간단한 담소를 나누고 차 한잔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자리 나눔방에서는 아동과 연계한 노인일자리사업이 시행되는 공간이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봉틀과 뻥튀기, 인형만들기 사업이 있으며, 재봉틀은 주민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장기려 박사 기념관은 의료복지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생 이웃을 위해 헌신한 장기려박사님의 삶, 정신을 되돌아 보는 공간이다.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영상물을 볼 수 있으며, 의사선생님을 상징하는 흰가운, 청진기 환자 진료에 직접 쓰시던 침대, 전시되어 있어, 어린아이들이 방문하면 청진기를 들고 의사체험도 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는 자신을 통해 무엇이 기억되길 바랐을까? 그가 남긴 커다란 병원도 업적도 아닌 빈부귀천을 넘어 생명은 오직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믿음 그리고 사랑은 베풀수록 더 커진다는 진리 그것이 생명의 소중함을 점차 잃어가는 우리시대에 장기려박사가 남겨준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평생을 고신의료원 옥탑방 24평에서 청빈한 삶을 사셨고 돌아가신 후에 쓸 장레비용 천만원 외에는 일절 한 푼도 모으지 않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다 베푸시고 1995년 12월 25일 영면에 드신 장기려 박사님이 그립습니다.


송명옥 기자 <wndhks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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