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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8- 40년전 광안리해수욕장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8-04-06 조회 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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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8 - 40년전 광안리해수욕장

안리해수욕장 자리는 수영의 옛 이름 남촌(南村)의 사장이라 하여 남장(南場)이라 했다. 이 남장은 남천동의 삼익비치맨션 동북쪽에서 민락동의 바다 매립지까지가 되어 지금보다 더 길고 넓게 반원형으로 휘어진 사장(沙場)이 바다에 접해 있었다. 40년 전 1978년 광안리해수욕장의 전경 사진을 보면 백사장에 고깃배가 있고 해수욕장 주변에 공터와 밭이 있으며 해운대 방면에 고층빌딩은 전혀 보이지 않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것을 실감케 한다. 부산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 단지인 삼익비치아파트 자리는 작은 동산과 갈대밭인데 산을 깍고 갈대밭을 매립해 아파트 단지로 변했으며 광안리 해변은 밭이라 호박,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는 시골 풍경이었다.



  

남촌의 어부들이 멸치를 잡던 광안리 백사장이 해수욕장이 된 것은 일본인들의 영향이다. 우리나라에 해수욕장이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 부산에 들어 온 일본인들에 의해 부산의 자갈치에서 시작되었다남포동 바닷가가 매축되기 이전은 자갈치 바로 위가 광복동 거리였고 그 광복동 거리는 일본인 상가였다. 그 상가에는 우리나라 사람(조선인) 고객이 많았다. 그런데 한 여름에 일본인들이 자갈치에서 해수욕을 할 철이면 광복동 거리(당시는 長手通) 왕래가 뚝 끊겼다. 일본인들이 발가숭이가 되어 노닥거리는 곳이라 하여 그곳으로 가는 걸 금기시(禁忌視)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여름장사가 안 된다하여 자갈치에서의 해수욕을 1913년 송도에 송도유원지를 조성하여 자갈치해수욕장을 송도로 옮겼다. 그러니 지금의 서구 암남동의 송도해수욕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이 된다. 그 당시의 암남동에는 모지포 근방에 사람이 살았을 뿐 한적한 바닷가였다. 그렇게 송도해수욕장이 생겼다 해도 우리나라 사람은 해수욕장에 별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 부산에 일본인 남녀 초·중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일본인 중학교가 1930년대에서 40년대 전반기까지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7월 하순 며칠 동안은 학생들의 심신을 단련시킨다면서 해수욕을 남녀학교 불문하고 전교생에게 시켰다. 그게 여름의 정규 행사처럼 되어갔다.


일본인 학교가 그러자 우리나라 초·중등학교도 여름방학 시작에 앞서 2~3일간을 해양 훈련의 날로 잡았다. 그 당시 중학교라 해도 교사는 거의가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인 학교의 행사를 한국인 학생에게도 적용시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부산시내 5년제 남녀 중학교가 6~7개교가 되었다. 해수욕을 할 자리가 모자랐다. 여학생과 남학생을 한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게 할 수도 없었다. 단일 학교는 단일 해수욕장이라야 지도와 관리가 편리했다. 그래서 한적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광안리와 수영, 다대포 바닷가가 여름 며칠 동안 학생들이 해양훈련을 하는 해수욕장이 되곤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광안리 주변은 그리 많은 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백사장으로 고깃배가 드나드는 한적한 포구였다.


광안동은 일명 범바위(虎岩)라 불리어 왔으며, 그 유래는 현재의 성분도 치과병원이 있는 옆쪽에 범의 형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바위를 보고 범이 나타난 줄 알고 혼비백산 기절을 하여 온 마을이 큰 소동이 벌어진 데서 전래된 듯하다. 예전에는 광안리해수욕장의 백사장을 멸치잡이 하는 막장이 있어서 남장(南場)이라 했는데, 그 남장이 넓은 광(), 모래언덕 안()이 되어 광안(廣岸)이라 썼다. 그 광안의 안()을 덕명인 편안할 안()으로 고쳐서 이즈음은 광안(廣安)이라 쓰고 있다. 1910년 행정구역을 제정할 때 동래군 남면 광안리라 개칭하였으며 광안리는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문외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의 수영로 아래쪽 부근에 30여 호의 마을이 있었으며,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광안공설해수욕장이 개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수욕장 앞바다에는 도메막, 뒷막, 새막, 굴뚝치막 등 5개의 어장이 형성되어 이 어장에서 광안리 어민이 주가 되고 인근 남천, 민락, 수영, 망미, 연산동, 심지어 동래지역 사람까지 모여들어 고기잡이에 종사했다. 815해방 전에는 수영로 위쪽을 윗깍단(윗뜸), 아래쪽을 아래깍단(아래뜸)이라 불렀는데, 위쪽에는 80여 호의 농촌마을이 산재해 있었으며, 농사만으로도 생계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광안리해수욕장 뿐만 아니라 수영해수욕장이란 이름을 가졌던 지금의 센텀시티의 남쪽 자리인 88올림픽 동산이나 요트경기장의 육지지역이 바다였고 그 센텀시티가 수영비행장이 되어 비행장으로서 통제를 받기 이전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의 좋은 해수욕장이였다.


수심이 낮고 수영강의 민물로 수질이 부드럽고 모래가 좋았다. 그 수영해수욕장이 비행기 활주로로 해수욕장 구실을 못하게 되자 광안리해수욕장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광안리해수욕장은 1960년 공설해수욕장으로 개장되었다. 백사장 길이 1.4km, 64m, 수용능력 162천명으로 면적 82,000인 광안리 해수욕장은 모래의 질이 좋고 부산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해서 접근성이 좋다. 그러나 주위 시가지의 오폐수로 바다가 오염되고 백사장 모래가 유실되어 사장의 폭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되자 수영구는 2016년 광안리해수욕장 백사장 복원을 위한 연안정비사업에 국·시비 135천만 원을 들여 모래 26557를 추가 투입하였다. 이 사업으로 기존 20~24m 불과했던 기존 광안리해수욕장 백사장 너비가 40~50m까지 늘어났다. 광안리해수욕장 좌우측인 민락동 회센터에 이어 남천동 삼익비치 앞 해안에 친수공원을 조성하고 있으며 레저보트 수상스키 등을 즐길 수 있는 수영구 해양레포츠 기반시설이 개장을 앞두고 있다.

 

기자도 20대부터 50대까지 대학생 군인 언론사 대학교 등지에서 근무하며 광안리해수욕장 해변에서 수영과 산책을 즐기면서 횟집, 호프집, 음식점, 레스토랑, 라이브 바에서 마시고 노래하며 청춘을 보낸 곳이다올 여름 광안리해수욕장 해변 무대에서 <봄날은 간다> <낭만에 대하여> <정든 배> <해변의 길손> <가방을 든 여인> <대니보이> <Summer Time> <Yesterday>등을 공연하기 위해 요즘 색소폰 연습으로 작은 정성을 쏟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인 2058년 광안리해수욕장을 위하여...    

                                       

주원 김영수 기자 lymanj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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